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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나태주 시인 시집 - 마음이 살짝 기운다

달님칭구 (Dalnimchingu) 2024.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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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음식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결한 음식은 젓과 꿀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도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젖과 꿀과 같은 아름다운 시를 안겨주는 나태주 시인의 시집 "마음이 살짝 기운다" 속에 담겨진 좋은 시를 만끽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태주 시인 - 마음이 살짝 기운다

 

 

미루나무 길 - 나태주 시인

 

여름날 한낮이었지요

그대와 둘이서 길을 걸었지요

그대는 양산을 받고 나는 빈손으로

 

햇빛이 따가우니 그대

양산 밑으로 들어오라 그랬지만

끝내 나는 양산 밑으로

들어가지 않았지요

 

그렇게 먼 길을 걸었지요

별로 말도 없었지요

이런 모습을 줄지어 선

미루나무들이 보고 있었지요

 

그런 뒤론 우리들 마음속에도

미루나무 줄지어 선 길이 생기고

우리들도 미루나무 두 그루가 되었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되어버렸지요.

 

 

그러므로 - 나태주 시인

 

너는 비둘기를 사랑하고

초롱꽃을 사랑하고

너는 애기를 사랑하고

또 시냇물 소리와 산들바람과

흰 구름까지를 사랑한다

 

그러한 너를 내가 사랑하므로

나는 저절로

비둘기를 사랑하고

초롱꽃, 애기, 시냇물 소리,

산들바람, 흰 구름까지를 또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구름이 보기 좋은 날 - 나태주 시인

 

머리 위에 깍지 베개를 하고

의자에 기대어 구름을 보고

하늘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와서 묻는다

지금 뭐하세요?

 

나 지금 일하고 있는 중이야

나에겐 쉬는 것도 일이고

자는 것도 일이고 하늘 보고

구름 보는 것도 일이야

 

그러하다

나에겐 날마다 책을 보고 글을 쓰고

강연하는 것만 일이 아니고

노는 것도 일이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도 일이란 사실!

 

일찍이 알았어야 했다

더구나 너를 생각하고

너를 사랑하는 일은 더욱

중요한 일이란 사실!

 

맑은 날 하늘과

하늘에 뜬 구름이 나에게

가르쳐준다.

 

 

맑은 날 - 나태주 시인

 

개울물을 바라본다

맑고 깨끗한 물

어! 물고기가 있네

 

물고기가 헤엄친다

내 마음속에도

맑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헤엄친다

 

오늘은 모처럼 맑은 하늘

나도 이제는 물고기

하늘 바다에 헤엄친다.

 

전화를 걸고 있는 중 - 나태주 시인

 

바람 부는 날이면

전화를 걸고 싶다

하늘 맑고 구름 높이 뜬 날이면

더욱 전화를 걸고 싶다

 

전화 가운데서도 핸드폰으로

멀리, 멀리 있는 사람에게

오래, 오래 잊고 살던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사람을 찾아내어

 

잘 있느냐고

잘 있었다고

잘 있으라고

잘 있을 것이라고

 

아마도 나는 오늘

바람이 되고 싶고

구름이 되고 싶은가보다

가볍고 가벼운 전화 음성이 되고 싶은가보다

 

나는 지금 자전거를 끌고

개울 길을 따라가면서

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중이다.

 

 

하물며 - 나태주 시인

 

나에겐 시간이 많지 않다

세상에 내가 남아있을 날이

그리 많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나에게

시간을 달라 그러면

서슴없이 준다

 

하물며 너에게서랴!

네가 나에게 시간을 달라면

언제든지 아낌없이 주리라

 

나의 시간보다 네가

나에게 더 소중한 사람이니까.

 

 

육아 퇴근 - 나태주 시인

 

애기 둘 다 재우고

10시 넘어 11시 가까워

겨우 퇴근한다는 말

마음에 돌을 던진다

 

그래 퇴근, 좋다

하루 종일 엄마 노릇

그 노역을 내려놓고

퇴근, 좋겠다

 

잘 자거라 잘 쉬거라

꿈속에서라도 혼자가 되어

훨훨 너의 동산에

맨발 벗고 뛰어놀고

하늘을 날아 구름도 되고

그러렴

 

내일은 또 아침

아이들 잠에서 깨면

출근해야지.

 

 

다시 중학생에게 - 나태주 시인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버스를 놓칠 때가 있단다

 

잘못한 일도 없이

버스를 놓치듯

힘든 일 당할 때가 있단다

 

그럴 때마다 아이야

잊지 말거라

 

다음에도 버스는 오고

그 다음에 오는 버스가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떠한 경우라도 아이야

너 자신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너 자신임을 잊지 말아라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있는 소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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